"..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히13:7에서)
오는 2027년은 미국 역사상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연방수사국(FBI)이 법무부의 명령으로 지난 1967년 이래 50년간 봉쇄해온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이하 MLK/킹) 관련 기밀문서가 공개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5개 캐비닛 분량이다. 진보주의자 잔 루이스 스미스 주니어 판사가 킹의 생일을 국정공휴일로 굳힐 목적으로 당시 FBI 전국수사 문서철 일체의 50년간 봉쇄령을 내렸던 것.
언론인 조얼 스카우슨이 ''보수계 다이제스트'' 수석편집인으로 있을 당시, 은퇴한 L. 패트릭 그레이 FBI 실무부국장에게 도대체 봉쇄된 파일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캐비닛 15개 중 14개가 "(킹의) 창녀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 나머지 하나만이 공산당 관련 파일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멋모르고(?) MLK 미화와 찬양 작업에 힘써 온 사람들은 킹의 참 면모를 알게되는 2027년까지는 좀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죽고난 후 그의 단점과 약점 특히 추한 비밀들이 모두 감춰지고 영웅시돼 버렸다. 존 F. 케네디도 마찬가지. 오랜 세월이 지나고나서야 그들의 숨은 비밀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세상 미디어는 모종의 어젠다에 의해 사람의 장단점을 클로즈업 한다. 언론에 의해 ''피 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미화 되다 못해 급기야 우상화 되는 사람들도 있다. 언론의 이해관계 탓에 철저히 드러나는 사람도 있고 철저히 가려진 사람도 있다.
지난날 필자의 젊은 제자들에게 소위 ''아프리카의 성자'',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슈바이처가 예수 크리스토를 성경대로 믿지 않은 일종의 비신자였다는 진면목을 소개해줬더니 노골적으로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이를테면 오래 존중해온 사람을 왜 그렇게 ''짓밟냐''는 것이다. 영웅들과 역할모범(role model)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진리에서 벗어난 사람이 영웅일지언정 ''성자''는 아니다. 성자는 거듭난 신자가 성자다.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보냄을 받아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자가 사도다. 성자도 아닌 영웅은 결국 세속적 우상에 불과하다.
요즘 어떤 방송 광고물에서 ''빛의 천사''로 떠받드는 여성장애인 헬렌 켈러는 천사가 아니라 즈베덴보리(스웨덴볼그)가 세운 이단 교회인 ''새 교회''(New Church/New Jerusalem Church)가 간판처럼 내세우는 이단자다. 사탄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사탄은 본래 ''핼렐''(루키페르)이란 이름의 대천사(천사장)였다.
같은 맥락으로 미 국민들 특히 소수계가 거의 우상처럼 열렬히 추앙해온 민권의 영웅 MLK는 미디어에 널리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본색이 따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 위선자였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사람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예를 들면 메시아의 조상이기도 한 왕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남의 여인을 겁탈하다시피 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고 하나님 대신 인구조사를 믿는 추악한 면을 성경은 그대로 노출시킨다. 역시 메시아의 선조인 유다는 야곱의 12 아들 중 맏형 레우벤을 능가할 정도로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한" 사람이었으나 며느리를 창녀로 알고 동침하기도 했다.
유일하게 개인의 생일이 국가 공휴일로 지켜지는 영예를 안은 MLK에 관해 우리들은 주로 좋은 점만 알고 있었다. 킹은 흡사 유색인종의 신처럼 거의 우상시되고 있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들중 평범한 누구처럼 추악한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늘 강조하는 얘기는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알고 지나치게 존경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말씀처럼 사람은 더 거짓되다.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고 고백해야 한다.
이 글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킹의 평범한(?) 모습을 바로 보고 바로 평가하자는 뜻의 글이다. 킹의 장점은 우리 누구나 너무 잘 아는 터이므로 여기선 킹의 이면에 중점을 둔다. 지난 비밀을 들춰서 어쩌자는 거냐는 시각도 있겠지만 죄악은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으니 사람을 무조건 미화하거나 과도히 숭모하지 말라는 얘기다. 성경은 다윗을 무조건 미화하지 않는다.
킹을 영웅, 민권운동 지도자로 볼 수는 있으되 ''순교자'',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로 추켜 올려주는 까닭을 필자는 잘 모른다. 킹을 바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높이지 않는다. 다윗의 추악했던 면모를 보듯 우리는 킹의 추악한 면모도 알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MLK의 본 이름은 ''마이클 킹''. 흔히 ''ML''(엠엘)로 불렸다. 1935년 MLK의 아버지(흔히 ''대디 킹''으로 불림)가 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이름을 따고픈 충동이 일어 교회 회중 앞에서 자신을 ''마틴 루터 킹''으로 칭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아들까지 ''MLK 주니어''라고 불리게 됐다. 둘 다 전혀 법적인 본명이 아니었다.
킹 부부의 표절 벽
킹이 1947년 에버니저침례교회에서 행한 첫 설교는 진보주의자였던 뉴욕 파크애브뉴침례교회(현 리버사이드교회)의 첫 목회자 해리 에머슨 포즈딕(1929~1946 시무)의 설교 ''삶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을 거의 표절했다는 것이 킹의 절친한 친구 래리 H. 윌리엄즈 목사의 증언이다. 킹의 첫번째 책 ''자유를 향한 거보''는 다양한 출처에서 여기저기 표절했다는 것이 킹 연구학자들 키잇 D. 밀러, 아이러 G. 제프 주니어, 데이빗 J. 개로우 등의 유력한 견해다.
보스턴대학교, 크로저 신학교에서 쓴 킹의 리포트/논문들은 학적 기준에서 볼 때 숱한 부분들이 표절한 흔적이 역력하며 특히 자신의 전공분야인 조직신학에서 그렇다. 고인의 아내 코레타까지 스태프로 포함된 ''비폭력사회변화를 위한 MLK센터'' 공보물,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논문''(이하 MLKJP)의 네 상임 편집인들이 내린 결론이다. 크로저에서 쓴 킹의 에세이논문 ''하나님 발견에서의 이성과 경험의 자리''는 신학자 에드거 브라잍먼의 작품 ''하나님 발견''에서 여기저기 표절했다. 킹이 보스턴대 입학 후에 쓴 ''현대 대륙신학''은 월터 마셜 홀튼의 책에서 대부분 표절했다.
킹은 또 박사학위 논문 ''폴 틸리히와 해리 넬슨 윌먼의 사고에서의 신 개념 비교''는 잭 부저 박사의 학위(Ph.D.) 논문 ''폴 틸리히의 신 개념에서의 이성의 자리''에서 50여 군데의 [완전한!] 문장들을 베끼고도 신학부문 Ph.D.를 취득했다. MLKJP는 또 킹의 이 학위논문중 틸리히에 관한 부분은 문장들의 49%만이 킹 자신의 낱말 5개 또는 그이상이 포함돼 있었다고 분석했다.
킹을 지지한 진보계 학자 데이빗 J. 개로우는 ''미국사저널''(JAH)의 1991년 6월호에 실린 ''킹의 표절: 모방, 불안정과 변조''에서 킹의 아내/비서 코레타 스캇 킹 여사가 "거듭된 표절의 공범"이었다고 썼다(제87쪽). 그 기사에 따르면 킹이 Ph.D. 학위가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움되지만 공정한 방법으로 취득하기엔 실력이 달려 수단방법 안 가리기로 하고 표절도 불사했다는 결론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왜 크로저신학교 교수들과 보스터대학교 교수진이 킹에게 학점과 학위를 수여했을까? 개로우는 같은 글(89쪽)에서 "킹의 학적인 작문들은 거의 예외없이 간추린 서술이나..남의 글을 비교한 데 불과했기에..킹의 교수들이 그에게서 그이상 기대하지 않았음을 강하게 시사해준다"고 썼다.
MLKJP 편집인들은 "..킹의 스승들이 그의 본문 도용 패턴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히 놀랍다.."고 썼다. 코레타가 고도의 본문 도용 기술을 발휘했다는 뜻일까? 그러나 학자 마이클 호프먼은 말한다. "킹은 정치적 타당성에다 흑인이고 야망을 갖고 있었다..좌파 교수들은 그런 학위후보자에게 속임수야 얼마만큼 개재됐든 말든 기꺼이 학위를 수여했다. 킹의 끊임없는 지적재산 도용 행위가 공식적으로 알려지기까지 40여년 걸린 것도 놀랍지 않다." 뉴욕타임즈 1991년 10월11일자(제15쪽)에 따르면 보스턴대 연구위원회는 "킹 박사가 논문 표절을 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킹 박사의 박사학위 철회는 있을 수 없다"고 밝히면서 그런 발표에 "별도의 목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정상대로 한다면 학위와 안수는 당연히 취소됐어야 했을 것이다. 보스턴대와 위원회가 정상이 아니란 얘기다.
그 유명한 이른 바 ''꿈의 선언''도 실은 어느 진보계 흑인 유명 설교가의 것과 내용이 매우 비슷하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본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킹은 젊은 시절부터 "싹이 노란" 사람이었고 기막힌 생애의 종국이 이를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킹과 미 공산당의 밀월
전술한 대로 2027년 공개(?)될 킹의 수사자료 캐비닛 15개 중 1개는 공산당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캐비닛에 보관된 자료의 대강 내용은 이미 증인들에 의해 폭넓게 폭로됐고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
MLK의 최측근은 줄줄이 ''빨갱이들''이었다. 물론 킹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설이 아직도 유력하다. 속깊이 빨갛지 않아도 최소한(!) 속껍질 정도는 빨갰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킹의 지지자였고 그의 전기를 쓴 데이빗 J. 개로우는 킹이 어느 사석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임했다고 술회했다. 개로우의 책 ''FBI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1981년)에 따르면 킹은 자신이 결성한 남부기독교지도자연맹(SCLC) 스태프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새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혁명의 시대임이 분명합니다. 미국 생활의 총체적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계급 투쟁에 개입돼 있습니다."
킹이 측근으로 두었던 공산주의자들을 개인별로 살펴 보자.
1955~60년 킹은 베이어드 러스틴을 자신의 비서/조력자/자문가로 두고 있었다. 러스틴은 뉴욕시립대학 청년공산당연맹(YCL)에 가입한 이래 거의 평생 공산주의자, 동성애자였다. 1944년 징집기피 혐의로 2년간 수감됐었고 1953년 1월23일엔 부랑/동성애 범죄로 60일간 징역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킹을 돕고있던 당시인 1957년 2월엔 제16차 미공산당대회에 참가했다. 한달 후인 1957년 3월. 킹은 러스킨과 함께 SCLC를 조직, 자신이 초대회장이 됐다. 부회장은 프렛 셔틀워스 목사로 남부컨퍼런스교육재단(SCEF) 대표이기도 했다. SCEF는 공산당의 최전선 단체였음이 추후 밝혀졌다. SCEF의 현장 디렉터 칼 브레이든은 당시 미국을 위협하던 공산쿠바를 돕는 쿠바공정거래위원회(FPCC) 전국 스폰서를 겸했다. 당시 SCLC의 프로그램 디렉터는 앤드류 영 목사. 지미 카터 행정부 유엔대사를 지냈고 애틀랜타 시장, 가장 최근엔 미교회협의회(NCCC) 회장도 지냈다. 영은 공산당 교육기관인 ''하일랜더포크스쿨''에서 훈련받았다.
같은 해 노동절. 킹과 4명의 인사가 테네시 몬트이글에 있는 ''하일랜더포크스쿨''(HFS)이라는 수상한 장소에서 열린 특별모임에 참석했다. HFS는 테네시주 공산당 조직책인 마일즈 홀튼, 노스캐롤라이나 공산당 조직책 단 웨스트가 세운 공산주의자들의 ''논산훈련소''였다. 모임엔 홀튼/웨스트 말고도 미 공산당의 공식당원인 앱너 베리, 제임스 덤브롭스키가 참석했다. 남부 각 주를 돌며 순회 데모/소요를 일으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러스틴은 1958년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모스크바에 다녀온 바로 얼마 후 저 유명한 킹의 첫번째 워싱턴행진 행사를 준비했다. 공산당 실조직인 ''일꾼(노동자)''(The Worker)이 킹의 이 행진 이벤트를 공산주의 프로젝트임을 공식 선언했다. 러스틴은 비록 1961년 킹의 곁을 떠났으나 1963년 8월28일 치러진 워싱턴 대행진 때는 킹이 그에게 두번째 고위 책임을 맡겼다.
러스틴이 킹을 일시 떠난 것이 킹의 공산당과의 ''결별''을 뜻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1961년 러스틴이 떠난 뒤 킹의 비서/자문가로 끌어들인 사람은 잭 오덜(=헌터 피츠 아덜)이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오덜은 최소한 1956년부터 미국공산당 전국위원회(NCCP)의 정회원이었다. 세인트루이스 ''글로브데모크럿''(지구촌민주당) 1962년 10월26일자 보도를 보면 오덜은 SCLC의 남동부 실무 총책으로 임명받았다. 그나마도 당시 이 언론에 있던 약간 명의 애국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언론에 의해 부정적인 보도가 나가자 킹은 오덜을 한껏 치켜준 후 해고했다. 그러나 그 바로 직후 오덜을 SCLC 뉴욕사무소 디렉터로 기용했다! [''리치먼드뉴스리더'' 1963년 9월27일자 참조].
1963년 그해 노스캐럴라이나 먼로에 있는 ''라벗 윌리엄즈''라는 한 흑인이 당시 중공의 북경으로 갔다.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 불과 20일 전에 윌리엄즈는 그곳 공산당 주석 마오저퉁(모택동)에게 킹의 운동을 위해 한마디 해달라고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윌리엄즈는 당시 공산국 쿠바에 우선적으로 기거하면서 미국 남부의 라디오 청취자들을 겨냥,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고주파 AM 송출로 주3회 정기적으로 프로퍼갠더 방송(''라디오 프리딕시'')를 통해 미국 흑인들에게 백인 상대 폭력을 공공연히 주문했다.
이 기간동안 윌리엄즈는 ''총기를 보유한 흑인들''이란 책을 냈다. 이 책에 서문을 쓴 사람이 다름아닌 MLK였다! 이 책의 편집자/발행인들은 몽땅 ''쿠바를 위한 페어플레이''위원회(FPCC) 지지자들이었다! ▪ 스탠리 레비슨
킹의 생애에서 유대인 스탠리 레비슨을 빼놓을 수 없다. 킹의 ''뒷처리'' 하수인이었던 레비슨은 미국공산당을 위한 소련 자금의 비밀유입책이었다. 킹의 멘토이기도 해 킹의 수많은 성공적 이벤트의 실제 브레인이었다. 킹의 책 ''자유를 향한 거보''를 그가 편집했고 출판사도 주선했고 심지어 킹의 세금보고도 대신 해줬다! SCLC의 기금모금과 선동작업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킹의 연설문 다수도 그가 작성했다. 그런 레비슨을 킹은 "가장 친한 친구"로 표현했다. 킹의 이같은 공산당과의 밀월을 고 케네디 대통령 등 여러 사람이 간곡히 만류했으나 킹은 필요하면 적당한 커버 수법을 통해 수사기관의 눈길을 따돌리곤 했다.
킹의 문란한 성생활: 마지막 밤도 창녀들과..
킹 당대의 중앙정보국(FBI. 국장 J. 에드거 후버)의 오랜 조사에 따르면, 킹은 아마도 평소 주체 못하는 섹스광이었던 모양이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찰스 브레넌 FBI 부국장은 킹의 사생활에 대한 오래 집요한 도청과 추적 끝에 잔 이스트 상원의원(공화/노스캐럴라이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잡한"/"음란한"/"자유분방한"/"야만적인" 등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그의 성편력을 묘사했다.
또다른 FBI 부국장 윌리엄 C. 설리밴은 킹을 100% 지지하는 진보파였지만 수사 결과 킹이 SCLC의 자금 일부를 호텔에서 술과 흑/백 창녀들에게 뿌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독교 명목을 내건 단체에서 거둔 돈을 그런 데다 쓸 생각을 했고 썼다는 사실은 실로 황당하고도 심각한 문제다.
설리밴 부국장은 진보주의자로 본래 킹을 100%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설리밴의 조사에 따르면 킹은 한밤에 두 창녀와 함께 지낼 때가 많았고 술/섹스 파티를 수시로, 많게는 며칠동안 벌였다. 이같은 생활 스타일은 킹의 연설/운동 투어에 곁들여진 다반사였다.
1968년 4월4일 킹이 암살된 당시 그와 측근이 숙박했던 테네시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은 현재 전국민권운동박물관(NCRM)으로 개조돼 있다. 이 박물관 안에는 킹과 측근들이 머물던 두 침실(306, 307호실)이 전시돼있는데 박물관 관계자들은 당시 숙박자들에 관해 밝히길 극구 꺼린다. [웹사이트 www.civilrightsmuseum.org/gallery/rooms306_307.asp 참조] 전시물 디자이너 제라드 아이스터홀드 씨는 그것을 밝히는 건 "모독에 가깝다"고 넌지시 시사했다. 까닭이 뭘까?
킹의 친구 랠프 애버내티 목사는 그의 책 ''그리고 벽은 내려앉았다''에서 킹과 측근들이 최후의 밤을 이 모텔에서 2명의 흑/백 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섹스를 하며 지냈고 새벽에는 또다른 한 명을 사디즘적으로 구타했다고 기록했다. 또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지낼 때 킹의 우선적 관심은 그곳 백인 성매매 여성들들을 자신과 측근들을 위해 확보해 두는 것이었다. 킹에 관한 이러한 도청/추적 조사는 당시 대통령의 동생 라벗 케네디 법무장관이 확인/결재했다.
설리밴은 킹이 수많은 유부녀들과도 염문을 뿌렸다고 진술했다. 설리밴은 30년간 FBI에서 지내며 본 수사대상들 중 "전적으로 타락해버린" 7명중 한 명으로 킹을 꼽았다.
맺음글
킹 당시의 FBI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악인이었다. 프리메이슨 33단이었다. 그렇다면 악인에게 반평생 뒤쫓기던 또 하나의 악인의 모습은 뭘까? 이른 바 ''이이제이''의 상황은 아닐까?
이상은 대중에게 알려진 파퓰러한 킹의 모습보다 그의 속깊은 진실에 더 가까운 내용들의 일부일 뿐이다. 킹의 이런 베일 뒤 모습은 대중에겐 왜 철저히 가려졌을까? 이 글 내용과 같은 유의 ''폭로''가 킹 음해 음모가 아니라 생애 미화로 일관해온 킹의 신화화 내지 신격화가 바로 음모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예수 크리스토만을 모범으로 삼고 바라봐야 한다. 인생을 의지하다 보면 대개는 환멸만 남는다. 이를 극명히 보여준 예가 황우석이 아닌가 싶다. 신자를 포함한 대중이 지나치게 존중하고 우러러보고 따르는 대표적 대상이 MLK다.
아멘넷/크리스천노컷뉴스 제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