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 제사장인가, 전 신자 제사장인가

  • 2006-10-31 10:47

종교개혁주간을 지내며…교회밖에서도 제사장 노릇 하자

 

10월 31일은 루터가 가톨릭의 그 악명 높은 면죄부 판매를 조목조목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 앞에 내 걸었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 해가 1517년이었으니 올해는 종교개혁 48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천년의 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넓은 의미의 개혁자들의 후손들인 우리는 루터, 칼빈, 츠빙글리, 메노 시몬스와 같은 믿음의 선조 덕으로 더 성경적인 신앙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이상을 집약하는 몇 가지 문구가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입니다. 당시는 문맹률이 90%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일반 민중이 사용하지 않는 라틴어로 쓰여 있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제마저도 돈을 주고 신분을 사게 된 사람들까지 있어서 그들은 당연히 문자를 몰라서 미사하는 법만을 겨우 외우거나 그것도 몰라서 제 멋대로 떠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해서 종교개혁의 시작을 95개조 반박문이 아니라 루터의 성경 번역에서 찾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독일문학사에도 길이 남을 루터의 번역으로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이 에스라를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말씀 없이 살았던 지난 날, 그 말씀을 거역하고 살았던 것이 부끄러워 우는 것이고, 그 말씀을 다시 듣게 되어 좋아서 우는 것입니다. 당시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의 감정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종교개혁의 이상, 전 신자 제사장

또 하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종교개혁의 이상이 있으니, 전 신자 제사장 교리입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한 성경의 가르침은 별개로 하고, 이 교리를 당대 역사적 정황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중재와 매개의 체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해 주는 것, 그리고 전달해 주는 것이 바로 사제와 성만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기 위해서는 사제가 집례하는 미사와 만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배제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 계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특정한 제사장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웅변합니다. 구약에서 지성소는 단 한사람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개방된 것입니다. 단 한 사람에서 모든 사람으로, 단 하루에서 모든 날로 확대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고, 모세의 꿈이었는데, 그것이 드디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 신자 제사장이란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희한하게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인 제사장.'''' 10월 28일치 국민일보의 한 칼럼에서 저도 참 존경하는 박종화 목사님께서도, 그리고 하워드 스나이더의 책 <참으로 해방된="" 교회="">(IVP)도 만인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본래 이것의 영어는 ''''Priesthood of All Believers''''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신자들이 제자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왜 만인이라고 말할까요? 그리고 만인과 전 신자 사이에는 이렇게 시비를 걸만한 어떤 중요한 차이가 있는 건가요?

전 신자 제상이 아니라 만인 제사장으로 번역한 이유

일단 이것은 번역상의 실수나 잘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하나는 신학적 요인입니다. 하워드 스나이더 교수가 한국 IVF 50주년 기념 강의에서 주류 교단, 예컨대 루터교나 칼빈의 장로교가 미진하게 개혁한 것의 하나가 전 신자 제사장 교리라고 했습니다. 슬로건과 달리 내적으로는 여전히 목사가 가톨릭의 사제와 다를 바 없다는 거지요. 이 부분에서 주류 개혁자들은 도로 가톨릭으로 회귀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웨슬리주의자요 자유교회 전통에 친화적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제가 속한 침례교나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친숙합니다.

그 한 사례가 설교권이니 강단권이니 하는 것으로, 평신도들에게도 설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제게는 참 이상합니다. 우리 한국이 아니라 미국 남침례교회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목사 안수 기도를 할 때, 교인들이 모두 나와서 목사가 되는 이를 위해 안수 기도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그것은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마치 목회자 - 여기서 타 교단에서는 성직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양인데, 저와 저희 교단에서는 성직자라는 단어를 일절 사용 금지합니다. 알다시피 성직자와 평신도 구분은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가톨릭적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 만의 권리인양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가 아니라 구교의 행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불충분한 교리였다는 것과 함께 지적할 것은 유럽적 상황입니다. 모든 유럽인들이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그가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시민으로 태어나는 동시에 유아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는 것은 동일하였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가 34세까지 밖에 살지 못한다고 믿었는데, 생일이 지난 지 한참인데 죽지 않자 혹시 자신의 출생 신고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합니다. 그가 확인한 곳이 바로 교회였고, 유아세례 명부입니다.

요는 한 사람이 태어는 순간, 그는 국가의 시민이 되면서도 교회 회원으로 자동적으로 가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 학자들에 따르면,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화두였다고 합니다. 자동적으로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어떠한 신앙 고백도 없이 신자가 되는 상황에서 1800년 전의 역사적 예수와 어떻게 동시대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묻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학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명백한데도 만인으로 번역하고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종교''''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경건이나 신앙이라는 뜻을 본래 담고 있던 것이 현재는 우리가 쓰는 신앙 체계와 형식으로서의 종교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종교란 다름 아닌 기독교였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으면 당연히 기독교이고, 기독교신자가 아닌 무신론자로 간주되던 역사가 서양입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은 좋은 예가 됩니다. 종교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항해서 종교를 옹호하지만, 그 책에서 종교란 곧 기독교입니다. 반면에 무속 신앙을 제외하더라도 유, 불, 선이라는 다원적이고 다신적 상황인 동양에서 종교는 기독교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전 신자 제사장 교리에 담긴 참 뜻

여하튼, 저의 의도는 만인이냐 전 신자냐라는 문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생사를 걸고 싸울 만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언어 이면에 놓인 교회와 국가를 동일시하던 소위 기독교 국가(Christendom) 개념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하여간에 모든 사람이 제사장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들이 제사장입니다. 믿지도 않는 이들이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인가요.

다른 하나는 이 기회에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함축하는 바를 간단히 말씀드릴 기회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제의 중재나 어떤 매개 없이도 ''''직접'''' 하나님 면전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모든 신자의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와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이름과 은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의 도움은 절실합니다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가 신자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와 독립된 개별적 존재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성인으로 자라날 때 부모의 도움과 영향이 중차대하다는 것을 연상하시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는 마땅히 신앙의 연수나 경험 등으로 보건대 선생이 되어서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그는 결국 목회자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중세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QT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줄 알아야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법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도해 주세요 하고 부탁만 하지 말고 본인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둘째,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앞의 것이 신자의 존재(being)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신자의 행동(doing)을 말합니다. 이것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제사장처럼 중보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해 중보하는 것은 특별한 몇몇 소수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책무입니다. 전도와 기도로 우리는 제사장적 삶을 살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가 구약에서는 성전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행해지던 것이었지만, 신약에 이르러서는 일상 전체가, 무엇보다도 신자 자신이 성전이 된 이상, 신자의 모든 행위는 바로 제사요 예배입니다. 로마서의 가르침대로 내 몸이, 그리고 내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캠퍼스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한 예배가 되는 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제사장 노릇 하자

저는 교회에서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 노릇을 해야 마땅하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그 안에서 각자의 은사와 직책, 사명을 따라서 봉사의 차원을 넘어서 사역의 지경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저 교인들이 자리만 채우는 것은 하나님이 정녕 원치 않는 일입니다. 모든 신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성도로 자랄 뿐 아니라 봉사, 곧 목회적 일에 동참해야 건강한 교회요 전 신자 제사장으로 종교, 아니 기독교개혁의 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 잠자는 평신도를 깨우느니 하는 말이 회자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크나큰 영적 유익을 얻었고, 교회마다 갱신과 부흥의 열기가 생겨났습니다. 이나마 한국교회가 유지되는 것에 제자훈련과 소그룹 또는 공동체 운동들이 기여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직 그 오랜 차별의 관행을 완전히 일소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가야할 길입니다.

한데, 너나없이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당한 논리임에 틀림없지만, 실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노라면, 결국 교회 성장의 한 방편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제자훈련이니, 셀이나 목장이니 해서 교회 안에서 모여서 행하는 훈련과 모임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는 마치 등불을 켜서 사람들을 환히 비추도록 등경 위에 두는 법입니다. 너무 교회 안에서만 잔치를 벌이는 것은 아닌지요. 너무 교회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전 신자 제사장의 본래 의도대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을 교회 안으로만 협소하게 국한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 드넓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전망을 상실한 채, 교회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매주일 예배와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구역 혹은 셀/목장 모임, 리더 혹은 중간 지도자 훈련 등 너무 많은 모임이 가정과 직장, 캠퍼스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런 훈련이 언젠가 열매를 맺어서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빛이 밖으로 밝게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훈련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제사장 노릇을 교회로 제한한다거나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가정과 직장, 캠퍼스에서 제사장의 사명은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울이 신적 권위가 아닌 사람의 예(禮)로 말한다고 했던 것처럼 하나의 견해로만 받아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 하나의 편협한 판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성전된 자로 하는 모든 일이 예배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전 신자 제사장의 정체요, 역할입니다. 종교개혁주간을 맞아 관행적으로 잘못 사용된 단어 하나에 이런 저런 생각을 붙여보았습니다.

김기현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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