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자살률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최고라고 합니다. 2003년에 4위였으나, 2004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10년 전인 1995년에 비해 2.2배나 증가한 수치입니다. 인구 10만 명당 26.1명으로 하루 평균 33명이, 약 44분당 1명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어릴 때, 복지시설이 하도 잘 되어 있는 북유럽의 나라들이 지루한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권태를 느껴서 자살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대로 고달픈 삶을 견디지 못하고, 내일의 희망이 없기에 자살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값어치를 매긴다면 예수님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소중한 생명을 제 스스로 중단하는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는 안 될 행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산다는 것이 고해(苦海)이기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남과 동시에 죽음의 순간을 카운트하는 것이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듣노라면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자살을 인정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연민과 동정마저 잃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마저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여간에 자살에 관한 이런저런 의문이 따라 다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은 대개 고통스런 삶을 감당하지 못해서,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어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렇지만, 자살로 고통이 마감될까요? 행복 시작은 아니라 하더라도 고생 끝일까요?
자살은 고통스런 현실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바람직한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는 자살은 죄가 아니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의 가르침은 명약관화해서 도무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를 잘 정리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자살은 하나님에게 범죄 저지르는 죄악첫째, 자살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불공정한 죄악이며, 마지막으로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므로 치명적인 죄악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제가 다른 어느 곳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자살한 자의 운명을 딱 잘라 말한 곳이 없으며, 그것이 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 물론 큰 죄라고 인정하지만 - 지옥을 단정한다면, 지옥 안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자살이 그만큼 큰 죄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지옥 운운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자살은 자유인의 권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기 생명이므로, 그리고 자유가 있으므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본회퍼는 생명의 신성함과 주어진 권리란 것은 기실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여 생명을 선(善)에다 거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자기 생명에 대한 자유라고 말합니다.(<기독교 윤리학="">, 143쪽) 그러니까 권리로 자기 생명을 해치는 선택을 할 절대 자유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봉사를 위해 생명을 나누어주는 제한적 자유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주인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 전체와 날줄과 씨줄로 엮여져 있습니다. 부모든, 자녀든 그의 죽음이 가족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단지 생명의 주인이 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이 죄라는 점에서 올바른 도덕적 선택이 아닙니다.
지나면 은혜라고 말할 때 온다둘째, 앞으로도 계속 고통스럽기만 할 것인가?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악몽 같은 현실이 결코 변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IMF 이후에 도산한 한 중소기업 사장의 인터뷰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전에는 자살하는 사람들더러 그럴 용기가 있으면 살지 뭐 하러 죽느냐고 생각했는데, 정작 자신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그들이 이해가 되고, 죽는 것이 겁나지 않더라고 하더군요. 사람이란 존재는 꿈과 희망이 없으면 살수 없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고난으로부터 비켜설 존재는 없지만, 누구도 구체적으로 고통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그랬기에 막상 예상치 못한 고난이 닥치자 그렇게 허망하게도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고난이 왔다면, 그 이후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견한대로 마치 당구공처럼 그렇게 결정된 방식으로 미래가 움직이라고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기 마련입니다. 현재의 안락함이 미래의 평안을 보장할 수 없듯이,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삶까지 계속해서 연장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폴 투르니에의 <고통보다 깊은="">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그가 중병에 시달리던 옛 환자를 길에서 만났습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장난스럽게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저는 그 때 그 시절에 대해 아주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어요. 물론 힘들었죠. 하지만 되돌아보면 제 삶에서 가장 윤택한 시기 중의 하나였던 것 같아요. 건강했던 20년 기간보다 아팠던 지난 몇 달 사이 저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우리 삶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밀어닥치는 온갖 시련의 시간이 지난 다음, 비록 그것이 우리 예상과 달리 제법 긴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 하더라도 좋은 날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과거의 고통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법입니다. 고생이 지나야 행복도 오는 것이 삶의 한 이치입니다. 원치 않았던 고통이 지나고 나면 예의 그 환자처럼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삶을 윤택하게 했었다고요. 그러니 앞으로도 삶이 계속 힘들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고 내일의 가능성을 스스로 그리고 너무 빨리 차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살 후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셋째, 자살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의문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살은 암묵적이던 명시적이던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다음의 삶이란 없다거나 아니면 행복이 가득하거나 또는 적어도 고통이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죽음 이후 소멸하여 아무런 의식이 없다고 말하고, 반대편에서는 자살은 자기 몫의 고통을 자의로 거부했으므로 형기를 채우지 않고 탈옥한 죄수가 더 큰 벌을 받듯이 더 큰 고통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하여간에 그는 어느 것을 취하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살 다음의 상태가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을 없애기 위한 자살을 반대합니다. 만약 견디기 힘든 고난에 의미가 있다면, 자살을 하게 되면 고통의 의미를 전혀 실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무의미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일지라도 그 고통이 죽음 이후의 소멸이나 무, 혹은 그 다음 생의 심판과 고통과 비교해서 더 나은 것인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모한 짓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로 사후에 대해 장담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사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있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 9:27)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따라 우리 인생에 대한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분이 계십니다.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고난의 은혜를 증거하는 분입니다. 이분이 지옥이 고통이 해롭게 사라진 곳이라면, 천국은 고통이 선하게 사라진 곳이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의 눈물="">, 12~13장)
어쨌든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습니다. 어느 TV 사극으로 기억합니다만, 한 주인공이 굴욕적인 상황에 처하자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더라도 싸우다가 죽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자네가 아직 젊어서 그렇다네. 모욕을 당하더라도 기회가 언젠가 있을 테니 참고 기다려야 한다네.'''' 지금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한 순간의 선택과 결단이 TV 광고 카피처럼 적어도 10년을 좌우하지만, 한 사람의 일생에서 지나고 나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인생이 되지만, 그러한 한 순간이 인생 전체로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은 산 자에게 정서적, 경제적 부담 줘넷째, 자살하는 사람에게 백번을 양보하여 고통이 사라진다고 해도, 살아남은 자의 삶은 어떨까요? 최근의 연구 조사 보고서는 자살자가 남긴 고통을 사회 경제적 비용으로 계산을 해냈습니다. 서울대병원과 이화여대 연구진의 조사에 따르면, 조기 사망으로 인한 생산과 수입 상실이 3조 700억 원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응급실 진료비 등 직접 비용이 95억 원, 가족의 의료비 등이 57억 원을 차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살자 가족의 경우 자살 이전에 비해 정신과적 질환은 4.6배, 일반 질환은 4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자살이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의 손실인 동시에 가족들에게도 크나큰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인 고통을 주며, 주변인들에게도 미치는 파급력이 심각한 것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자연사보다도 자살은 훨씬 더 크고 강한 고통을 주위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산 자에게 정서적 죄책감과 경제적 부채를 고스란히 떠넘기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대안으로서 자살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더 심화시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 하나 고통을 피하겠다고 자살 이후의 남은 자들에게 고통을 준다면, 고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자살은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입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입니다. 특히 부모의 자살은 자녀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날 내내 쉽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자녀의 자살은 씻을 수 없는 아픔입니다. 당사자의 고통과 그의 자살로 인한 고통의 크기와 넓이를 가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남아 있는 사람의 고통이 현재의 고통을 능가할 것입니다.
파스칼의 유명한 내기 이론(wager theory)이라고 있습니다. 사후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세가 없다면, 두 사람 모두 무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내세를 믿고 산 사람도 하나도 손해를 볼 것이 없습니다. 둘 다 영(zero)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라면 천국을 믿은 사람이 예컨대 100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 혹은 무한대의 마이너스가 될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수학적 확률에 의거해서 내세를 믿는 것이 옳습니다. 이 논리의 진의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수학적 확률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파스칼은 신앙을 수학 공식으로 환원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여간에 파스칼의 논법을 문자 그대로 빌려 온다면, 자살이 고통을 경감시킨다는 어떠한 확고부동한 증거도 없고, 도리어 증대시킨다는 것은 확실하다면, 당연히 사는 쪽에 한번뿐인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꿋꿋하게 고난을 감수한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처럼, 그 고통의 폭풍이 한참 물러간 어느 날에 행복했노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자살은 고통의 출구가 아니라 입구입니다. 끝내기가 아니라 연장입니다. 고통 그 자체에 출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 구원이 있듯이 말입니다.
김기현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목사
(www.soojungro.com, http://club.cyworld.com/ezrakim)
추신: 이 글은 하박국서로 본 고난의 의미와 신비에 관한 글의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의>고통보다>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