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에 함께 한 기독교인들

  • 2020-05-18 17:45

 

[앵커]

5.18 민주화운동에는 기독교인들도 다수가 참여했습니다.

신앙의 양심으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과 정의를 지키다 희생당한 기독교인들을 소개합니다. 최경배 기잡니다.

[기자]

10.26 사태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염원이 커지는 상황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라남도 광주에 비상계엄군을 투입합니다.

계엄군은 민주 정부 수립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광주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습니다.

[인터뷰]
(류동인 집사 / 故 류동운(한신대) 동생)
“군인 트럭들이 이제 오더라고요. 그러더니 거기서 이제 군인들이 죽 내리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열을 착 맞추더니 갑자기 뛰어오면서 옛날에 그 큰 박달나무 몽둥이로 사람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더라고요.”

폭력적인 시위진압은 시민들을 향한 발포로 이어졌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약 9일 동안 이어진 시위와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163명, 행방불명자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 2,139명 등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습니다.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이 휴일이었기에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던 광주기독병원은 부상당한 시민들을 치료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인터뷰]
(박경희 사모 /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사)
“당장 시급한 게 그 통증 좀 없애 달라고, 저분들 좀 덜 아프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
(김복순 사모 /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 감독)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이렇게 적이 되어서 저렇게 학생들을 쐈는데, 하나님 저들을 회개하게 해달라고, 회개하고 어서 이 나라가 정말 평안한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죠.”

5.18 민주화운동의 수많은 희생자들 속에는 평범한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5.18 당시 한국신학대생이었던 류동운 전도사는 선배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목회자인 아버지가 붙잡았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류동인 집사 / 故0 류동운(한신대) 동생)
“(형님이) 나가려니까는 이제 아버님이 잡으셨죠. 아버님이 지난주 설교에서도 ‘누군가가 희생해야 역사가 부활한다’고 설교에서도 말씀하셨는데, 왜 댁의 아들을 잡느냐, 당신의 아들을 잡느냐. 이 말씀을 하시더래요. 그래서 아버님이 붙들지 못했죠. 형님을.”

류동운 전도사는 도청 안에서 시신수습과 행방불명자를 접수받는 일을앞장서서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류 전도사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류 전도사의 시신은 계엄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난 뒤 한참 뒤에 발견됐습니다.

[인터뷰]
(류동인 집사 / 故0 류동운(한신대) 동생)
“나중에 3일 뒤에 망월동(묘역)에서 우리 쪽으로 연락이 왔더라고요. ‘확인하라’. 얼굴이 부패하여 있었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였든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주 험악하게 형님 얼굴이 변해 있었어요...”

5.18 당시 상무대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문용동 전도사는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엄군이 힘없는 노인을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말리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부상자 구호와 헌혈운동 등을 지원하던 문 전도사는 5월 21일 계엄군이 물러난 뒤 도청 지하실에서 무기관리 임무를 맡았습니다.

당시 도청 지하실에는 광주 시가지를 반파시킬 만큼 상당량의 폭약이 있었는데 문 전도사는 폭약이 폭발할 것을 우려해 폭약 뇌관을 제거하고 끝까지지 무기고를 지켰습니다.

문 전도사는 안타깝게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진입한 계엄군에게 희생됐습니다.

[인터뷰]
(김영복 집사 / 광주서석교회, 무기고에 생존했던 최후 2인)
“헬기에서 ‘투항하라’고 했었는데, 맨 마지막에 (문 전도사와) 둘이 살아 남아있었거든요. 제 바로 앞에 문 전도사가 가고 제가 그 뒤를 따라 갔었죠. 맨 뒤에서 문 열고 막 나가는데 (헬기) 위에서 총격으로 사살해서 제 앞에서 문 전도사가 27일 아침에 유명을 달리했죠.”

광주시민과 계엄군 모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무기고를 지켰던 고 문용동 전도사의 희생은 오랫동안 오해를 받다가 뒤늦게 평화주의자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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