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교회는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애를 쓰고 계신데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중에 한 가지 같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부흥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부흥 운동은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자랑스러운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장로교의 그레이엄 리, 우리 이름으로 이길함 선교사는 그 당시의 부흥 운동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기도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런 형태로 진행되었다. 기도를 마친 후 회개할 사람이 있느냐고 하자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 한 사람 씩 일어나더니 자기 죄를 자백하고는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루에 몸을 뒹굴며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때리면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였다. 우리 집 요리사도 자복하면서 뒹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내게 소망이 있습니까?과연 제가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하면서 내게 달려와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부흥 운동에 있어서 집회마다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이었습니다. 감리교의 무스(Jacob. Robert. Moose) 선교사는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이 집회는 가장 놀라운 집회였다. 사람들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부끄러운 죄까지도 고백하였으며잃어버린 선함을 회복시킨 집회였고 구원의 체험과 확신을 이룬 집회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흥이라는 용어의 본디 뜻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윌리엄 노블 선교사의 기록이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당시 부흥회는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한 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여기서 저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의식" 부흥 운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되기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가 한국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내면서 다른 의미로 변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부흥이 교회 성장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을 한번 해 보죠.성경에는 부흥이라는 용어가 나타날까요? 우리말이긴 합니다만 놀랍게도 신약이 아니라 것도 구약에 단 한 번 나타납니다.
하박국 3장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흥과 교회 성장이라는 말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부흥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교회의 성장을 마치 교회의 존재 목적처럼 여겨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부흥이라는 단어를 일상 언어, 기도, 설교 속에서 교회 성장의 의미로 왜곡된 채 사용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곡된 의미가 보편화되면 돌이키기 쉽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사람의 능력, 즉 설교, 교육 제도, 교회 경영, 교회의 문화적 활동, 복지 서비스 등이 견인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개입이 교회의 모든 면에 나타나도록 만들어 가야 합니다. CBS 논평이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이루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을 드러내는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