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 김희헌 목사 "안병무 선생의 신앙과 삶을 이어 가겠습니다"

  • 2022-11-02 12:00


민중신학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근 그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는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삶을 주목했던
안병무 선생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향린교회 김희헌 목사를 만나
안병무 선생의 삶과 신앙에 대해 들어봅니다.
 
 
■ 방송 : CBS TV < 파워인터뷰> 10월 25일(화) 18:10 / 10월 31일(월) 12:00
■ 출연 : 김희헌 목사 (향린교회)
■ 진행 : 최경배 기자
 
◇ 최경배 기자 : 목사님 안녕하세요? 올해는 민주신학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안병무 선생님 탄생 100주년입니다. 최근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이어서 학술대회를 했죠. 
 
◆ 김희헌 목사 : 예
 
◇ 최경배 기자 :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안병무 선생님, 어떤 분이셨는지 먼저 소개해주시죠.
 
◆ 김희헌 목사 : 질문하실 때 민중신학자이자 인권운동가 이렇게 잘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두 가지 키워드가 될 것 같아요. 민중신학에 오시기 전까지 그분은 평신도 목회자이자 성서신학을 전공하신 학자였고요. 또 한편에서는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진보적인 실천적 지식인 중에 한 분이셨죠. 
 
학자가 그분에게 제일 중요한 부분일 텐데 그 점에서도 아주 치열하셨어요. 50여 년 동안 800여 편의 논문과 30여 권의 책을 내셨는데. 이걸 학교에서만 쓰시지 않고 또 역사의 현장에서 늘 서 있다 보니까 투옥도 되시고 또 해직도 되시고 이런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가셨죠. 이분은 자기 삶을 예수라고 하는 분을 어떻게 나의 오늘의 현실 속에서 만날 수가 있느냐, 이 끈질긴 화두를 잡고 가다 보니까 아주 생산력 있는 삶을 사셨던 것 같아요. 
 
이분이 1922년생 그리고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셨는데요. 그때 태어나신 분들은 대부분 아주 풍파가 심한 역사를 살아가실 수밖에 없었죠. 그분은 가정이 좀 불안정하셨어요. 가난하셨고, 그래서 이듬해에 간도로 이주를 합니다. 당시에 일제시대 때 생업 삶의 현장에 뿌리가 뽑혀버린 민중들이 한 300만 명 정도가 간도로 이주를 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셨던 거죠. 거기에서 그분은 고난의 문제를 가장 깊이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체험 가운데 하나가 그 분이 어린시절에 예수를 만납니다. 근데 이게 그분은 유교 가정이었어요. 아버지에게 사서삼경도 많이 배우셨고 그런 분위기였는데, 예수를 만나는데. 친구들로부터 동네의 교회가 거기에는 많이 섰고요. 그럴 때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은 사람이 있었대, 이게 그분에게는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뭐지 하면서 찾아갑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데 그게 진솔하면서도 참 소박하죠. 출발은. 그러다가 용정 부근에 있는 은진중학교가 당시에 용정 부근에 있는 4개 중학교 가운데에서 기독교 학교로 꽤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해낸 대표적인 학교인데, 이곳을 다니면서 신앙을 깊이 있게 체화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예수가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그게 삶을 밀고 나아가는 제일 커다란 힘이었던 것 같아요. 
 
46년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을 하게 됐는데 여기에서도 다른 것보다도 예수를 위해서 함께 나아가는 동지들과 함께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이 되고. 또 그분들의 이름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일신회, 한 분 하나님을 한 몸이 되어서 공동체가 되어서 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여기에 담겨 있는데 이게 모토예요. 이분의 삶이에요. 이분이 설교를 잘한다는 말씀을 듣고 어느 부인회에서 찾아와가지고 우리 설교를 해달라, 이러다 보니까 여기서 동료들과 함께 있었던 일신회와 고민을 하다가 그럼 일신교회로 짓고 우리 한번 해보자 이렇게 해서 일신교회를 47년부터 전쟁 날 때까지 한 3년간 하는데, 이분은 여기에서 굉장히 희열을 느끼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들을 하는데. 사실 전쟁이 터지면서 대혼란기에 빠지니까 위기 앞에 선 사람들이 보이는 그런 여러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서 굉장히 실망하세요.
 
그리고 전쟁이 터지던 50년 6월 25일 한 2, 3일 전에 이 일신회 동지들과 함께 지금으로 보면 구기동 앞에 있는 수도원이 있었는데요. 거기에서 이틀 동안 기도하시는 도중에 전쟁 소식을 듣고 자신은 서울에 남고자 했지만 피난 가는 당시의 그 혼란스러움, 여기에서 환멸을 느꼈고 또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뿔뿔이 일신회 회원들이 흩어집니다. 근데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 반성이 일어나는 거죠. 도대체 이 혼란기에 우리가 해야 할 길이 뭐냐 하는 건데.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어떤 격랑 속으로 바로 들어가 가지고 어떤 정치적인 현실로 들어가지만 이분은 신앙 공동체로 다시 갑니다. 
 
전쟁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던 53년도 초에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 명동 남산 자락에 있는 케이블카 자리, 거기가 향린원이라고 하는 고아원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를 터를 잡고 12명이 수도생활과 생활공동체를 함께하는 생활을 거기서 시작을 하죠. 그게 이제 향린교회의 전신이 되는 것인데요. 출발인데. 3년간 얼마나 뜨겁게 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삶을 다 바쳐서 하자라고 해서 각각 하나의 집을 모으고 가운데에서는 책을 모아놓고 함께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 반복하면서 했었던 거죠. 그런데 이 3년 정도 하다가 이분이 한계에 부딪혀요. 어떤 한계에 부딪히냐 하면은, 굉장히 뛰어난 동료들과 있었기 때문에 각자 유학도 떠나고 결혼을 하고 이미 의사생활을 했었던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화되어 가는데 사실 가정을 꾸리다 보니까 함께 공동생활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고 이러다 보니까,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이렇게 정리를 해네요. 이기주의의 벽이 너무 크다. 우리가 함께 공동생활해서 사도행전에 있었던 삶 자체를 우리에게 실현하는 것에서는 너무 장벽이 크다. 그러면서 오늘날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했었던 사도행전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 한국 교회에 정착돼 있는 기독교는 우리 삶을 초월하기에는 너무 한계가 많다. 이런 것을 절감하면서 56년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버립니다. 그것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당시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어떤 연구의 어떤 선두를 끌고 가고 있는 데인데,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이었는가, 이 물음을 안고 떠나요. 10년간 거의 한국에 오지도 않고.
 
거기에서 루돌프 불트만이라고 하는 당대의 최고의 신학 지성 밑에서 하이데거 라고 하는 실존주의 철학과 함께 굉장히 깊이 있는 엄격한 서구신학을 훈련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간헐적으로 한국에 글을 쓰기도 했어요.
 
안병무는 역사 속에서 예수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도대체 이 역사가 그 2천 년 전에 예수만이 아니라 오늘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는 그런 예수가 뭐냐, 이런 걸 묻다 보니까 이분은 점차적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걸 뒷받침했었던 게 70년부터 당시 한국신학대학교 신학학 교수로 시작을 했고, 73년도에 독일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진 한국신학연구소 이걸 중심으로 이제 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이 삶 속에서 함께하는 동지들과 태어난 게 민중신학입니다. 민중신학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한국의 신학이 당시 지금도 많이 그렇습니다만 한국의 신학이 외국의 신학을 번역하는 것에 그쳤었죠. 그러나 한국 역사 속에서 우리의 문제 우리의 하나님을 찾았던 그리스도인들의 노력들 이게 한국의 신학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신학이고 안병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들도 독일과 미국에서 많이 나왔을 정도로 굉장히 명성을 얻었던 존경받을 분이시죠.  민중신학자로서의 활동들은 이따 차차 풀어가기로 하고요. 아무튼 이 활동들을 10여 년간 하시다가 96년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게 되었죠. 벌써 26년이 되었네요. 안병무의 삶이 이렇습니다.
 
◇ 최경배 기자 : 앞서 말씀처럼 안병무 선생은 민중신학을 창시하신 분 가운데 한 분 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방송을 시청하시는 분들 중에는 민중신학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민중신학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시죠. 
 
◆ 김희헌 목사 : 민중신학을 통칭한다면 민중신학은 민중이라고 하는 화두 자체가 그렇듯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하나님, 이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서에 비추어서 깊이 있게 관심하는 신앙, 저는 이게 민중신학에 대한 정의라고 할까 이렇게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민중신학이 뭐다 하는 민중신학의 신학적인 내용보다도 저는 오히려 민중신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드린다면 이래서 민중신학이라고 하는 거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당시는 우리나라 역사적인 상황으로 본다면 군부독재의 10여 년 동안의 깊어진 인권유린과 민주주의의 위기의 시대였었죠. 이 암흑이 끝날까 하는 면에서 회의를 일으켰던 때이고 유일하게 청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하고자 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여러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민주주의 위기, 인권의 억압, 분단이라고 하는 이 문제는 점점 깊어가고 통일에 대한 희망들은 없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어떤 종합적인 화두를 당시에 사람들이 민중이라고 하는 어떤 총칭을 하면서 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민중 시나 이렇게 표현한 것 같아요. 
 
여러 현상들 가운데에서 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왔었던 화두는 지식인들만의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민중 자체에서 올라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게 1970년 11월 13일에 있었던 전태일 사건인데. 전태일이라고 하는 분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기독 청년이 었어요. 
 
전태일 사건을 보면서 신학계 내에서는 대단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청년들도 대학을 중심으로 그리고 해직되었다 하더라도 지성인들 중심으로 우리가 민중을 어떻게 볼까 하는 시각이었다면 밑에서 솟아 올라와 버리는 거죠. 이 사건이 우리가 하나님은 고난 속에 있다 하면서도 뭔가 놓치지 않았는가 하는 그런 반성을 크게 일으켰고. 이 민중 신학자들이 공통되게 말하는 게, 이 전태일 사건에서 오는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거였었죠. 
 
그런데 민중이라고 하는 말은 여전히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1920년대 초반에 그 역사의 질곡 일제강점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 민족 수난의 문제를 이겨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주체가 누구냐를 말할 때 민중을 말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이 민중이라고 하는 개념이 한 100년간 이제 사용되어진 언어인데. 타고 오면서 70년대 80년대 90년대 넘어오면서 민중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거예요. 정부에서는 조금 억압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언어가 되었고. 우리나라가 성장하다 보니까 민중이라고 하는 그런 말들은 이렇게 나랑은 먼 그런 이야기처럼 들려지기도 했었는데. 
 
단적으로 민중이라고 하는 언어가 여전히 살아 있는 어떤 증거들은 몇 년 전에 정부 고위관료가 '민중들은 개돼지다' 이런 표현으로 굉장히 발칵 한 번 뒤집힌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 높으신 분들 빼고 나서 나머지 다 개 돼지란 말이냐 하는 그런 어떤 오래된 공감대가 있는 건데. 이런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우리가 주목해서 삶을 해석하고 살아갈 때 어디에 관심이 해야 되는가 하는 면에서 여전히 민중신학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 관심은 타당하고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 최경배 기자 : 민중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아까 말씀하셨던 부분을 질문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수적인 분들 중에는 민중신학이라고 하면 좀 막연하게 부정적인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민주신앙은 진보적 신학이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그런 분들에게 민중신학을 소개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 김희헌 목사 :저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정말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그런 나뉨, 이런 게 의미가 있는가. 저는 무의미하다. 그건 한 두 가지 의미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우리가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그런 이념과 이념적 대립과 갈등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한 것들이 우리에게 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까지도 충분하게 우리는 느껴 왔다는 점이 첫 번째고요. 
 
두 번째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맞고 있는 어려움들은 진보 보수의 문제로 풀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은 거대한 문명사적인 전환의 시대에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들, 그리고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의 양상 자체도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코로나 사태를 우리가 3년간 어렵게 경험하는데 이게 진보는 공격하고 바이러스가 보수는 공격하지 않습니까? 기후위기 시대도 마찬가지죠. 진보적인 집단들에게 위기이고 보수에게는 아닌가요?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어떤 그 틀에서 민중신학을 바라본다면 우리 안에서 행진해 나아가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라는 것은 사실 그것 자체가 관념이에요. 제가 보기에 현실이 아닙니다. 아니 우리 삶과 몸 자체가 진보적인 요소와 보수적인 요소 지키려고 하려고 하는 것과 나아가려고 하는 것을 동시에 갖고 있고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고 우주의 생리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애를 보더라도 앞으로 밀고 나아가고자 하는 젊은 영혼을 가졌었던 때에는 대체적으로 다 진보하고자 하는 그 희망으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르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우리 한국 교회에서 봤었던 이 진보의 젊은 영혼이 가지고 있었던 그 신앙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함께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전진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문을 하고 싶어요.
 
◇ 최경배 기자 :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가 '한국 민중문학의 새로운 목소리'였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을 지금 이 시대에 주목하는 이유가 주제에 담겨 있는 것 같은데, 학술대회에서 어떤 목소리가 나왔습니까? 
 
◆ 김희헌 목사 :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었는데 두 가지 관심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병무 자체가 파란만장한 치열한 삶을 신앙인으로서 살아갔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유산은 뭘까 하는 물음이 하나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유산은 오늘 우리 시대에 이미 그분은 없는데 계승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갈 것인가 하는 그 두 물음을 갖고서, 한 20개 단체가 함께 한 1년간 준비를 해서 25명의 발표자와 논평하면서 굉장히 큰 학술대회 였는데요. 거기에서 그때 사용했었던 알린 포스터가 이것입니다. 
 
보시면 크게 보면 3부로 이루어졌고 8개의 분과로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안병무의 제일 커다란 화두가 역사 속의 예수이거든요. 예수가 저 세상에서 2천 년 동안 그리고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살았었던 그런 어떤 신앙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계신 분으로서 우리 역사 속에 살아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한다면 여러 모습에서 찾아보는 거예요.
 
흔적들을 8가지로 봤다고 보겠는데, 요즘 관심이 큰 생태학적 관점, 또 평화와 통일이라고 하는 우리 한반도에서 제일 중요한 그런 문제, 그리고 여성 신학적인 관점, 노동과 경제, 해방의 관점, 이웃 종교와의 대화 속에서 기독교 영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과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뭔가 하는 관점, 그리고 이런 기독교 사회운동이 굉장히 역사가 깊은데 이 속에서 민중신학과 안병무의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길은 앞으로 어떻게 갈 건가 하는 관점, 그리고 마지막에는 굉장히 한국교회가 앞으로 실험해야 될 소수자 문제, 퀴어의 문제, 이 문제는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이 학술대회에서 담겼던 주요 목소리였습니다.
 
◇ 최경배 기자 :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그의 신앙과 삶, 신학을 들어봤는데요. 끝으로 안병무 선생의 삶과 신앙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학술대회를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교회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 김희헌 목사 : 안병무의 정신 속에서 찾아오는 것일 텐데요. 안병무의 정신 속에서 이번 학술대회에서 두 가지를 크게 저는 느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서 예수를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거 이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이것은 한국의 문화 속에서 한국의 정신 속에서 지금 우리 한국의 삶 속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 그 의미에 대한 것이었고요.
 
두 번째는 성서의 예수를 우리가 정말로 잘 믿고 있는가, 오염되지 않았는가 우리 다른 사상으로. 그래서 그 예수 속으로 끝없이 들어가는 이 성서예수를 그대로 우리가 온전히 따르고 있는가. 안병무의 표현대로라면 우리가 예수의 얼굴을 정말로 잘 그려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안병무의 특징은 우리만 예수를 알고 우리만 예수를 독점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자. 예수의 얼굴을 그려내는 것을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병무 스스로도 교회 신앙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철저했기 때문에 그분이 신앙 공동체를 실험해 온 것은 그 삶으로서 아주 굵직굵직하게 네 번 다섯 번씩 공동체와 자신의 운명을 함께해 왔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 안에 묶이지 않고 그것이 이 역사와 세계 전체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는 그 길이 무언가 그것을 그려내자 하는 그 가르침이지 않았는가.
 
그래서 역사 속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려내는 것, 이게 안 선생님이 가졌던 생을 관통하는 화두였다면 이번에도 우리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안 선생님에게 가장 커다랗게 배운 다시 생각해 보고 오늘 우리 시대에 예수의 얼굴을 그려낸다는 게 무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최경배 기자 : 많은 신앙인들에게 영향을 준 안병무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웃들의 삶,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관심, 그런 마음들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김희헌 목사 : 고맙습니다. 
 
 
<김희헌 목사>
 
향린교회 담임
한국민중신학회 회장
 
[영상제작 : 정선택, 최내호]
[영상편집 : 서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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