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방문하려고 계획한 교회사 인물들에 관한 자료조사를 마치고, 우리 부부는 1997년 4월 6일에 드디어 6,000Km 이상의 대장정을 출발하였다. 우리는 오후 7시 10분에 본을 출발하여, 루터의 유적지 가운데 하나인 보름스(Worms)를 향하여 달렸다. 보름스는 본에서 남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다.
우리는 저녁 늦게 보름스에 도착하여 캠핑카에서 잤다. 4월 초순의 보름스의 날씨는 상당히 추웠다. 우리는 이런 추위가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여 담요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밤새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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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루터의 동상이 있는 장소부터 찾았다. 우리가 찾은 루터 동상은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동상의 높이는 약 2미터정도였다. 이 동상은 1856년에 시작해서 1868년에 완공되었으며, 여기에 서 있는 루터는 성경에 손을 얹고 서 있는데, 이 모습은 루터가 1521년에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 칼 5세(Karl V)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라는 설명이 밑에 적혀 있다.
루터 동상 밑에는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c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말은 루터가 1521년에 보름스 의회와 황제 앞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독일황제와 의회가 루터에게 그의 개혁사상을 취소하라고 할 때에 결연한 자세로 그들 앞에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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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동상 바로 밑에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자 4명의 동상이 네 귀퉁이에 앉은 자세로 배치되어 있다. 후스(Johann Hus, 1415)는 손에 십자가를, 위클리프(Johann Wycliffe, 1387)는 성서를, 발두스(Petrus Waldus, 1197)는 허리에 주머니를, 사보나롤라(Hieronymus Savonarola, 1498)는 오른 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이 4명은 루터보다 100여 년 전, 혹은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중세 가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는 개혁을 시도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처형되거나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 4명의 종교개혁자들을 루터 동상의 발 밑에 둔 것은, 그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선구자요 그들의 개혁사상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4명에 대하여서는 그들의 활동지역을 방문하게 될 때 좀 더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루터 동상의 바깥쪽 주위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운 헤쎈의 필립(Phillip) 백작과,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III세의 동상이 서 있고, 루터를 학문적으로 도운 멜랑히톤(Philipp Melanchton)과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그리고 그 외에도 루터를 도운 스파이어(Protestierende Speyer, 1529), 프리데(Ausburger Friede, 1555), 막데부르크(Trauernde Magdeburg, 1631) 등의 동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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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동상 주위에 헤쎈의 필립 백작과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동상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들 세속 통치자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고,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세속 통치자들의 도움은 루터에게는 약점이 되기도 했다.
독일 농민들이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독일의 통치자들에게 대항하여 농민전쟁을 일으켰을 때, 루터는 농민들의 편을 들지 못하고, 세속 통치자들의 편에 서서, 농민들을 학살하라는 편지를 썼다. 루터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세속 통치자들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터가 농민들을 학살하라는 편지를 쓴 것은 오늘날까지 루터의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루터의 동상을 본 다음, 루터가 1521년에 심문을 받았던 보름스 의회가 있었던 왕궁 터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찾기 위하여 보름스에 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에서 운영하는 안내소에 가서야 이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장소는 오래 전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진 장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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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은 왕궁 터에는 본래 왕궁이 있었으나 300여 년 전에 프랑스에 의해 파괴된 다음 작은 공원으로 남아 있다. 루터가 황제 칼 5세(Karl V) 앞에 당당히 서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용기 있게 맞섰던 자리에는,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돌 판이 놓여 있다. 나도 그 돌 판 앞에 서 보았다. 500여 년 전 그날의 루터가 상상되어 가벼운 감격과 흥분이 내 가슴에 밀려왔다. 나는 그 돌 판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루터는 1521년 1월 28일부터 5월 25일에 보름스에서 개최된 신성 로마제국의 의회에 출석하라는 소환명령을 받았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III세는 루터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껴, 루터가 의회에 참석할 경우에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의회 측으로부터 확보해 놓고 있었다.
보름스에 도착한 루터는 4월 17일에, 그동안 그가 쓴 25권의 책에 쓰인 내용들이 이단사상인 것을 시인하고, 이를 취소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주장들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4월 18일 하루 동안 친구와 중재자들의 조언도 듣고, 오랫동안 기도도 하면서 답변할 준비를 하였다.
루터는 4월 19일에 의회에 참석하여 자기의 개혁사상을 취소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말하고 그의 답변을 끝맺었다.
루터의 답변을 들은 의회는 루터의 문제를 확정하기 위하여 몇 번의 회의를 더 가졌다. 그러나 루터는 그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향하였다. 그런데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가는 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리드리히 III세가 루터를 보호하기 위하여 루터를 납치하였던 것이다. 의회가 루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프리드리히 III세는 루터가 곧 체포되어 처형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비텐베르크로 가는 루터를 아무도 모르게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숨겨두어 루터를 보호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이 성에 머무는 동안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황제 칼 V세는 의회 마지막 날인 1521년 5월 25일에,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에는 루터를 악명 높은 이단으로 규정하고, 루터의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은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적힌 돌 판이 있는 자리는 세계 교회사적으로 볼 때, 그리고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의미가 있는 자리다. 만약 여기에서 루터가 파문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했더라면 교회의 역사는, 인류 역사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가 500여년 전에 섰던 이 자리는 세기적인, 아니 밀레니엄적인 의미를 갖는 자리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탁견과 용기 덕택으로 수억 아니 수십억, 수백억의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세기가 지난 오늘, 루터의 종교개혁은 빛을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제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선행)도 강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함께 행함도 강조되는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행함을 강조하는 제2의 종교개혁은, 외형상으로는 ''''믿음으로만''''(sola fide)의 루터의 신학사상에 반대되는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일이다.
루터는 ''''믿음으로만''''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결코 행함(선행)을 배제하거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루터가 비판한 행함은 중세의 가톨릭교회가 주장한 성자숭배, 성물숭배, 면죄부 같은 잘못된 선행들이었다. 루터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선행)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몇 차례 더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름스의 일정을 다 마치고 루터와 함께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이끈 또 다른 종교개혁자 칼빈이 활동했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