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인 1923년,
일본 간토지방에서 대규모 지진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지진 피해로 혼란스런 상황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일본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러나 간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토학살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김종수 목사를 만나 간토학살에 대해 들어봅니다.
■ 방송 : CBS TV < 파워인터뷰> 2월 8(화) 18:10 / 2월 13일(월) 12:00
■ 출연 : 김종수 목사 (간토학살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 진행 : 최경배 기자
◇ 최경배 기자 : 목사님 안녕하세요?
◆ 김종수 목사 : 네. 안녕하세요?
◇ 최경배 기자 : 1923년에 일본 간토지방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당시에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올해로 100년이 됐는데요. 목사님은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으셨어요.
◆ 김종수 목사 : 네.
◇ 최경배 기자 : 내용 들어보기 전에 먼저 본인 소개부터 해 주시죠.
◆ 김종수 목사 : 저는 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 그리고 대학원에서 종교교육 MA과정을 했는데 청소년들하고 국제 관련 교류 사업을 하면서 이 사건을 만나게 됐고, 그 뒤 이후로 계속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로 1923 한일재일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있고, 100주기를 맞이해서 한국의 종교시민사회단체가 다 함께 추도사업을 펼쳐가자고 해서 모인 단체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 최경배 기자 : 간토대지진, 아마 많은 분들이 관동대지진이 익숙하게 들리실텐데, 100년 전 간토지방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 김종수 목사 : 일반적으로 시민들이 간토 관동 이게 많이 혼동을 하게 되는데요. 실제적으로 일본에서 현지명을 간토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간지 한자로 쓰면 그것은 우리 식으로 바라보는 관동이 되는 거죠. 중국의 베이징 북경 이런 것처럼. 1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는데. 사실은 이 학살사건을 말하기 전에 9월 1일 날 11시 58분에 큰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지진이 일어나면서 땅이 갈라지고 건물도 무너지고 전신주가 쓰러지면서 전깃줄이 끊어지고 그러면서 곳곳에 불이 일어나고. 11시 58분이니까 점심을 하던 때니까 화덕에 불씨들도 막 날리고 그래서 집이고 건물이고 크게 불이 붙어서 도쿄가 완전히 불바다가 됐어요.
지진으로 인한 피해도 있지만 그 이후로 벌어지는 대화재 때문에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고 그래서 수치로 보면 약 한 10만 5천 명 정도가 죽거나 실종되고. 그리고 건물 전체가 한 11만 동 전체가 부서지고 한 21만 채의 집이 완전하게 소실되어져서 도쿄는 거의 뭐 불지옥 아수라장과 같은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이재민들이 생겨난 거죠.
그런데 그때 난데없이 근거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사람들 사이에게 돌아다니기 시작한 거죠. 우리가 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문이에요. 우물에다 독을 풀었다.
◇ 최경배 기자 : 조선인이.
◆ 김종수 목사 : 조선인이 일본인이 사는 마을에 독을 풀었다. 그리고 일본인이 사는 집에 부녀자 혼자밖에 없는 우왕좌왕하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들어가서 강도짓을 하고 강간을 하고 윤간을 했다. 또는 산업체에다가는 불을 질렀다. 그리고 폭탄을 품에 안고 다니면서 일본 천왕을 테러하기 위해서 그렇게 돌아다니는 수십 또는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몰려 다닌다. 이런 유언비어들이 횡행했죠.
◇ 최경배 기자 :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입장에서 그런 소문이 돌면서 상당히 격앙됐을 것 같은데. 그로 인해서 발생한 일이 집단확살인 건가요?
◆ 김종수 목사 : 실제적으로 그 지진이 발생하면서 곧 이어서 여기서 근거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여기저기 간헐적으로 있기는 했어요.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피난 다니는 사람들이. 하지만 그 유언비어를 믿고 바로 즉각적으로 뭔가 행동을 취했다라고 하는 것은 별로 나타나 있지 않아요. 도쿄의 한 다리에서 조선인이 일본인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살해당했다라고 하는 기록이 간헐적으로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학살이 시작이 된 것은 9월 2일 이후부터예요.
◇ 최경배 기자 : 9월 2일이요?
◆ 김종수 목사 : 예. 9월 2일 날 아침에 중요한 정부의 발표가 나는데요. 9월 1일부터 여기저기 떠돌던 유언비어를 일본 정부가 사실확인 없이 그것을 그대로 일본의 관공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군 면 리 이런 단위에 공문을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일본의 해군 통신망을 통해서 일본 전역에 조선인이 아까 말씀드렸던 유언비어와 같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사실로 만들어서 전신으로 보내요.
그렇게 되고 난 다음에 바로 이어서 이러한 조선인들의 난동 때문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조직해서 도쿄의 중심부로부터 조선인을 체포하고 구금하고 반항하면 죽이고, 그리고 마을마다 자경단을 만들어서 너희들의 마을 너희들의 집 너희들의 기업체를 너희들이 지켜라 라고 이야기해서 자경단을 만들라고 얘기해요.
◇ 최경배 기자 : 대지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언비어가 퍼졌던 것이고, 단순히 그것만으로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부가 개입됐군요.
◆ 김종수 목사 : 그렇죠.
◇ 최경배 기자 : 간토 조선인 학살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들도 남아 있습니까?
◆ 김종수 목사 : 역사적인 사료는 곳곳에서 있습니다. 재판 기록도 있고, 군이 어떻게 이동했는가, 무기가 어디로 나갔고 어디로 들어왔는가, 군인들이 얼마만큼 이동하고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일지들이 있죠. 군인들이 그때 함께 했던 군의 자기 기록도 있고 많은 사료들 속에서 간토학살을 이야기하는 근거들은 충분합니다.
또 하나는 일본 학살된 사이타마·군마·치바·가나가와 이 지역 곳곳에 지금도 일본 학살 추도비가 세워져 있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있지도 않은 사건에 추도비를 만들어서 매년 정한 날에 추도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있지도 않은 사건을 그걸 기억한다고 하는, 더군다나 기념일도 아닌 일을. 그렇기 때문에 사료도 있고 지금까지 100년 전부터 계속적으로 추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이 정도 되면 이 사실을 인정할 법도 한데 일본 정부는 일본에 남아 있는 사료들은 정부가 공인할 수 있는 문서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라는 말로 그 사례를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있지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추도하는 저들은 이상한 사회불순한 세력이라고 이야기한다든지 그런 일들이 지금도 있어서 일본이 한 번 더 자료나 이런 근거들을 공식적으로 정부문서라고 말하지 않고 있죠.
◇ 최경배 기자 : 군에 관한 기록까지 있는데 100년 전 있었던 학살 사건에 대해서 진상규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 김종수 목사 : 그렇죠. 처음에 일본 정부는 그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난이 일어나고, 이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지진으로 인한 재난이에요. 이 재난으로 인해서 세계에 적십자사 관심을 갖고 구제활동을 하러 일본에 들어가게 되는 그때 학살 소문도 같이 일어났던 거죠. 그러니까 일본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과 더불어서 기자단도 같이 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간토학살 사건과 관련돼서 흔적을 지우는 일에 아주 주력을 했습니다. 조선인이 학살됐는데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모아요. 그래서 살아남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죽은 조선인을 불태우는 작업을 시킵니다. 증거인멸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조선인한테 시키는 거예요. 관련된 자료를 없애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 치안유지법을 발동해서 누구도 간토학살 사건에 대해서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도록 보도통제를 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는 한동안 계속 간토학살 사건을 누구도 말할 수 없도록, 그리고 자기들이 간토학살 사건 당시에 일어났던 유언비어를 사실화 하는 작업을 토론을 통해서 진행을 해요. 다시 말하면 조선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이런 나쁜 행동을 했다라고 하는 것을 신문에 보도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1923년에 10월 11월 달에 곳곳 신문에서 조선인이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라고 하는 신문기사들이 곳곳에서 계속 나오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일본 군대가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라고 하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죠.
◇ 최경배 기자 : 그렇다 라고 한다면 당시에 희생된 분들이 몇 분이나 되시는지 이런 파악이 제대로 됐을까 싶은데 어떻습니까?
◆ 김종수 목사 : 파악을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1923년 12월 일본의 제국의회에 두 명의 무소속 의원이 나가이 류타로 의원, 다부치 토요키치 두 의원이 일본 총리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질문을 해요. 일본이 국가가 조선인에 대한 과도한 탄압행위를 했다 라고 해서 질문해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물을 때, 그때 야마모토 곤노효 총리가 그 질문한 두 의원을 이렇게 지긋이 바라보면서 '지금 조사 중에 있는 사항이므로 나는 대답할 수 없다'라고 해서 대답을 회피해요.
그러면 총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조사가 진행이 된 것으로 믿어야 되는 것이 맞는 거고, 그러면 조사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야 되는 게 맞는 거죠. 그러나 그 이후에 일본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학살된 사람이 한 300명 정도, 더더군다나 조선의 총독이었던 갑자기 총독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조선 총독은 그때 당시에 학살된 조선인이 단 두 명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 독립신문이 있었는데 그때 그 독립신문에서는 유학생들을 통해서 또 조선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아주 암암리에 일본 경찰을 피해서 조사를 해서 6천661명의 조선인이 죽었다라고 구체적인 숫자를 발표 합니다만, 독일의 외무성에서는 2만 명까지 학살 피해자를 보고 있어요.
그러면 2만 명에서 2명까지 이 편차가 이렇게 큰 것은 일부러 조선인의 학살 숫자를 부풀려가지고 배·보상을 더 많이 받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철저히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은폐했고 학살 피해자들을 증거 인멸하기 위해서 불에 태워서 없애는 그러한 일들이 자행됐기 때문에 지금도 정확한 숫자가 몇 명이다라고 말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그런 상황입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한일협정을 앞두고 식민지 시대의 이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이승만 정부가 긴급하게 급조한 문서가 있어요. 그게 일본 징집피학살명부에요. 근데 이 명부에 한 290여 명의 조선인 학살 피해자 명부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독립신문의 6천 명에 비하면 290여 명은 턱없이 적은 거잖아요.
그래서 저희들이 한신대학교 상생전환센터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 연구프로그램을 받아서 이번에 일본 사료 속에 들어 있는 조선인 학살 피해자 명단 이름만이라도 찾아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이름을 찾아가지고 이승만 정부 때에 만들어진 명부하고 같이 이렇게 모았어요. 한 490명 정도 돼요. 그래도 이렇게 턱없이 부족한 거잖아요. 지금 현재의 수준은 그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런데 그 이전까지는 사실은 숫자로만 6천여 명의 피해자라고 하는 숫자로만 했는데 올해 추도식 때에는 500명의 이름이라도 그렇게 부르면서 그러면서 위령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최경배 기자 : 올해가 간토학살 100주기입니다. 100주기를 맞아서 기독교계가 추도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먼저 교회가 이 사건을 주목하는 이유 어떤 겁니까?
◆ 김종수 목사 : 우리 기독교에서는 두 분의 신구약시대의 거장이 있죠. 구약시대 모세라고 하는 큰 스승이 있고 새로운 계약의 예수님이 계신데 공교롭게도 이 두 분이 태어났을 때 학살의 위기에서 살아남으신 분들이에요. 이집트제국의 유아학살으로부터 모세가 건져짐 받았고, 헤롯의 대학살로부터 예수님이 사시게 된 거죠.
예수님께서 평화의 나라를 만드시는 그 당신의 신의 뜻을 만드는데 가장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오직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간토학살은 사랑이 아닌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서 학살을 일으킨 사건이에요. 일본인 조선인 민족 간 증오 미움을 내란을 일으킨다라고 하는 그런 이유로 뒤집어 씌워가지고 그것을 일본인들로 하여금 적대감을 불러일으켜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의 해법은 평화라고 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접근한다라고 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계승하고 그래서 이것을 평화롭게 풀어나가는 방법을 교회가 먼저 제시해야 한다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제가 속한 교단은 9월 첫 주일이 재일동포 선교주일로 정했어요. 이것은 간토학살 사건과 무관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 재일동포 선교주일날 해마다 간토학살 사건 추도집회를 해왔고. 그리고 올해는 작년 총회에서 한국인이, 그러니까 재일한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 한국 땅에 세운 추도비라든지 조형물이 없어요. 일본에는 굉장히 조형물이 많은데, 그래서 이번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는 추도 조형물을 만드는 것을 교단의 사업으로 정했고요.
무엇보다 일본에서 한국의 시민사회 단체하고 같이 연대해서 큰 100주년 추도집회를 하는데 거기에 실무 책임자를 맡고 계신 분이 NCC 간사장인 김성재 목사님이시고 일본 NCC 간사장. 그래서 공교롭게도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두 목사가 같이 함께 공동으로 책임지고 주관하는 그런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 최경배 기자 : 제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과거 기사를 봤더니 특별법 제정을 10여 년 전부터 요구해 왔더라고요. 아직까지 진행이 되지 않고 있고 또 100주기인 올해도 특별법 제정을 추도사업위원회에서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죠.
◆ 김종수 목사 : 아마 간토학살 피해자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시민사회단체들이 추도하고 기억하는 거 그거 고마워하겠지만 그러나 그들로부터 받고 싶은 것은 일본 국가가 왜 나를 죽였나. 죄도 없는 나를 죽인 일본 국가가 나한테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한테는 그렇게 물을 거예요. 왜 일본 정부가 아무 이런 이야기를 안하고 있는데 국가가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마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특별법을 만들어서 국가 정부로 하여금 진상규명을 하도록 국회가 명령하는 거죠. 그래야 진상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일정 기간에 걸쳐서 조사활동을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서 일본 정부에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발언할 수 있으니까.
19대 때 여야의원이 103명이 동의를 했어요. 굉장히 많은 수가 동의를 했거든요. 그때 19대 국회에도 103명의 여야의 의원 동의를 받은 법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우수 법안으로 뽑힐 정도였는데 안 됐어요. 그때는 보수당의 반대가 있어서 그랬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21대 국회에 지금 다시 법안을 발의를 했는데요. 지금 현재 한 80여 명의 의원들이 여야의원들이 그리고 모든 당의 의원들이 지금 공동발의에 서명을 했어요. 그런데 적어도 100년인데 100명은 넘어서야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해서 지금 나머지 20명의 의원을 발의할 의원을 찾는데요. 핵심적인 건 그겁니다. 국가가 조사를 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일본 정부에 물어야 된다 국가책임을. 그래서 특별법 제정을 계속 요구하는 것입니다.
◇ 최경배 기자 : 간토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 오셨는데요. 100주기이기 때문에 뭔가 또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아서 국민들께 시청자 여러분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끝으로 한말씀 해주시죠.
◆ 김종수 목사 : 이 간토학살 사건에 대해서. 관동대지진도 관동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는 분도 아마 나이가 꽤 드신 분들일 거예요. 이 사건을 아셨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인데 문제는 알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아요. 교과서에도 별로 없고 그리고 한국으로 쓰여진 책도 많지 않고 그래서 제가 엿장수 구학영이라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 책을 쳐낸 것도 너무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는 연구서 일본 책을 번역한 연구서들이 한 몇 권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사실은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디어 시대니까 유튜브에 간토학살 김종수 1923 이렇게 하면은 관련된 자료들을 영상으로 많이 볼 수 있으니까 영상으로라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고요. 여러분들의 지역구 의원이 누군가를 좀 봐주세요. 그래서 이 지역구 의원들이 간토학살 이 특별법에 공동발의를 했는지 안 했는지. 그리고 발의를 하더라도 법 제정이 돼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법 제정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지역구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이 지역구 의원한테 전화하셔서 이건 진보 보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함께 같이 특별법 제정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다 함께 노력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지금 올해 가장 집중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이 사건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일입니다. 세계 제노사이드사에서 간토학살 사건은 언급이 안 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건을 영어로 독일어로 많이 알리는 작업을 지금 해야 되는데 그 일을 연구자들 굉장히 많이 이렇게 애를 써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거듭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 최경배 기자 : 한일양국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제대로 밝히고 또 용서하고 화해하고 이런 과정이 필요하겠죠.
◆ 김종수 목사 : 네.
◇ 최경배 기자 :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아서 진상규명 그리고 피해자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일이 꼭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김종수 목사 : 고맙습니다.
<김종수 목사>
간토학살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상임대표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 관장
[영상제작 : 이정우, 정선택]
[영상편집 : 서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