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에 <개역성경>과 <통일찬송가>가 폐간되었습니다. 50대 이후 세대가 대체적으로 그렇겠지만 저 또한 <통일찬송가>의 폐간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받긴 했지만 20년이 넘도록 애환을 함께했던 터라 <통일찬송가>의 폐간을 아쉬워하는 성도들은 꽤 되지 싶습니다. 20~30년마다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찬송가의 세계적 추세라 알고 있습니다. 1983년에 <통일찬송가>가 출간되었으니 <새찬송가>는 때맞춰 나온 셈입니다. 문제는 내용 면에서 이전보다 질이 더 떨어졌고, 교회 연합에 일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점이겠지요.
<새찬송가>만큼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킨 찬송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2000년 11월에 첫 시제품이 발표되자 찬송가 전문가들의 분위기는 싸늘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의 작곡가 박재훈 목사는 "이대로 발간할 경우 국제적 망신을 당한다"며 100곡 이상을 전면 수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2004년의 두 번째 시제품을 거쳐 2006년에 최종판을 출판했지만 내용상 별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박재훈 목사는 9곡이나 되는 자기 곡을 삭제하라며 반발했고, 미주(美洲)찬송가공회는 한인 교회들에게 <새찬송가>를 사용치 말자는 권고문까지 보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한국교회는 찬송가 이권을 놓고 여러 차례나 법정 다툼을 벌이며 망신을 자초했지요. 완벽한 찬송가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권과 교권 때문에 편집위원의 90% 이상이 비전문가들로 구성되면서 21세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 사장된 곡, 한국서 부활한국 선교 122년 만에 출간된 <새찬송가>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국적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찬송가공회는 <통일찬송가>가 우리의 곡을 17곡만 게재했으나 <새찬송가>는 128곡(19.8%)이나 게재했다는 점을 자랑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부끄러워해야 할 통계입니다. 어떻게 세계 선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는 대한민국 찬송가의 80%가 외국 곡일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찬송가의 비율 20%도 따져 봐야 합니다.
이번에 새로 편입된 111곡의 한국 곡 중에 2005~2006년에 작사되거나 작곡된 곡이 28곡이나 되더군요. <새찬송가>가 출판된 2006년에 작곡된 곡도 3곡이나 됩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작 기간이 10년이나 걸렸는데 2005~2006년에 작사, 작곡된 곡이 28곡이나 포함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검증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 아닐까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작품의 질이 아니라 전·현직 교단장이거나 유명 대형 교회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새찬송가>에 작품을 올린 경우도 한두 건이 아닙니다. 심지어 부부 목사가 가사와 곡을 쓴 경우(308, 614장)도 있습니다. 교단들이 신앙인의 교과서에 다름 아닌 찬송가 선정을 놓고 나눠 먹기를 한 것입니다. 2004년의 두 번째 시제품 찬송가 분석 결과를 보니, 한국인이 쓴 93곡 중 한국적이라고 할 만한 곡은 16곡에 불과하더군요. 하지만 제게는 이런 내용을 자세하게 따질 여유도 지면도 없습니다. <새찬송가>의 외국 곡 비율이 무려 80%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2006년에 출간된 우리 찬송가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된 것이 분명한 일본 찬송가 <고금성가집>의 자작 찬송가 비율이 23~25%이고, 미국 찬송가
의 경우는 무려 자작곡이 88%에 이른다고 하니, 가슴이 답답할 따름입니다.
20대 80이라는 비율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용입니다. 80%의 외국 곡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이번에 <새찬송가>에 새로 편입된 외국 곡이 53곡인데요. 83년 이후, 그러니까 <통일찬송가>가 출판된 이후 작곡된 곡은 불과 7곡뿐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새찬송가>에 편입된 나머지 46곡의 외국 찬송가는 지난 20~30년 동안 작곡되어 각 나라의 크리스천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작품들이 아닙니다. 30여 곡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젊은 곡이 60세입니다. 심지어 30곡 중에는 종교 개혁 시대 때 작품도 끼어 있습니다. 본국에서조차 사장되었거나 잘 안 불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런 곡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완벽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10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성탄 때마다 널리 불리고 있었던 곡(113장)이나 <통일찬송가>엔 빠졌다가 <새찬송가>에서 부활한 성가 ''오 홀리 나이트''(622장)와 같은 곡들까지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처럼 400~500년 전에 작곡되었더라도 예술적으로 탁월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면 계속 불러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술적 가치도 낮고 역사성마저 의심스러운 외국곡들이 수십 곡씩이나 <새찬송가>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정말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새찬송가>가 주체적이 아니라 사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란 증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현실의 아픔과 희망의 자리는? 저를 더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새찬송가>가 과도하게 미국 중심적이란 사실입니다. 겉표지만 바꿔 놓으면 미국 사람들이 자기네 찬송가라 착각할 것 같습니다. <새찬송가>는 총 654곡 중에 미국 곡이 322곡이나 됩니다. 49%를 넘는 비율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곡보다 2.5배 많습니다. 새롭게 들어간 외국 곡이 53곡 중에 28곡이 또한 미국 곡입니다. 역시 절반을 넘는 52%! 이 통계도 실감이 안 나십니까.
그렇다면 53곡의 절반도 넘게 미국이 가져간 반면 23개 나라가 25곡을 나눠 가진 게 <새찬송가>란 사실을 보면서는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앞에서 1983년 이후에 작곡된 외국 곡이 7곡이라 했는데요. 그중에 4곡을 미국 사람이 작곡했거나 편곡했습니다.
어떻게 분석해 봐도 미국의 그림자는 <새찬송가>의 절반을 덮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곡만 좋으면 그만이지 미국 곡이 절반이면 어떤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반미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절반이 넘는 미국 곡들로 인해 우리의 정서, 우리 고유의 가락이나 화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우리 현실의 고민과 아픔과 희망이 찬송가에서 설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찬송가를 부를 때 이러한 행간을 읽어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새찬송가> 212장 2절 가사입니다. 제 고향 집에는 조카가 자기 어머니의 한평생을 이 한 구절에 담아 직접 쓴 족자가 걸려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앙인들은 모두 찬송가에 얽힌 깊은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 서적을 펼쳤을 때 첫 장이나 끝 장에 인용된 한 구절의 찬송가를 보면 그렇게 반갑고 가슴이 짠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 찬송가는 신앙인의 삶의 애환을 노래한 대중가요였고, 또 다른 이에게는 멋진 클래식 음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찬송가가 아픕니다. 내 삶의 일부였던 찬송가가 아프니 저도 아픕니다. 교회에 갈라 치면 찬송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삶의 무게가 힘겨운데 이제부터는 상처투성이가 된 찬송가까지 부축해야 할 판입니다. 우리 찬송가의 쾌유를 빌 따름입니다.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통일찬송가>새찬송가>통일찬송가>새찬송가>고금성가집>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통일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새찬송가>통일찬송가>통일찬송가>통일찬송가>통일찬송가>개역성경>